독일-라트비아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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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중세
2.2. 근세
2.3. 20세기
2.4. 21세기
3. 경제 교류
4. 문화 교류
4.1. 스포츠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독일라트비아의 관계에 대한 문서다. 양국은 유럽연합, 나토, 발트해 국가 이사회 회원국이다. 라트비아가 유럽연합에 가입한 이후, 양국간의 교류, 협력이 많아지고 있다.


2. 역사적 관계[편집]



2.1. 중세[편집]


라트비아가 기독교화된 것은 13세기로 독일계 선교사들과 십자군들에 의해 기독교화되었다. 오늘날 라트비아에 해당하는 지역에서는 해안 지방의 리보니아인들이 여타 부족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독일인들은 이를 가톨릭을 선교할 기회로 보고 리보니아인들에게 접근하였다. 그러나 선교 사업은 시원치 않았고, 교황의 명령으로 하노버의 베르톨드가 이끄는 소수의 북방 십자군이 1198년 리보니아로 파견되었다. 베르톨드가 이끄는 십자군이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리보니아인의 포위 공격을 받아 전멸한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리보니아의 십자군을 증원할 것을 명령했고, 1199년 알브레히트 주교가 이끄는 북방 십자군이 리보니아에 들어왔다. 알브레히트가 이끄는 독일인들은 1201년 리가 주교구를 세웠으며, 1202년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을 창설한다. 리보니아 기사단의 임무는 리보니아 연안의 다신교도들에게 가톨릭을 전파함과 동시에 이 지역의 독일인 상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독일 도시들과의 해상 무역을 증진시키는데 있었다. 리가의 알브레히트 주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영토를 늘려 몇년 안가 대주교로 승진하고 리가도 대주교구를 갖춘 도시가 되었다. 1282년부로 리가한자동맹의 일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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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서유럽식 봉건제도가 도입되어 라트비아에 리보니아 기사단령(Livonian Order)과 리가 대주교령(Archbishopric of Riga)이 세워젔다. 농노가 된 라트비아인들은 일주일에 4~6일은 독일인 영주나 주교의 땅을 경작해야 했으며, 그 외에도 소득의 25% 가까이를 갖가지 명목의 세금으로 뜯겼다.참조 다른 한편으로 리보니아에 정착한 독일인들은 대개 차남, 삼남 출신 기사나 상인들이 많았고, 독일인 여성들이 이민 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라트비아인 현지인 여성들을 현지처로 맞이하였고 발트 독일인 상당수에는 라트비아인, 리보니아인의 피가 섞이게 되었다.


2.2. 근세[편집]


독일문화가 라트비아 문화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라트갈레는 한때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소속이 되기도 한 적이 있지만, 라트비아인들은 19세기 말까지 자신의 조국에서 8%도 채 안 되는 발트독일인들의 밑에서 농노라는 이름으로만 존재할 수 있었다.

발전을 거듭했던 리가에서 라트비아인들이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고, 발트지역에 정착해 살던 발트독일인이 아니면 제약이 아주 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발트독일인들이 가지고 있던 경제적인 특혜 또한 아주 많아서. 러시아인들이 라트비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때부터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도 발트독일인들은 라트비아인들과 차별된 특별한 혜택을 누리면 살았다.

인접한 리투아니아에는 로마 카톨릭이 종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반면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는 독일에서 기원한 루터교가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가정행사가 전부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라트비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리 신심이 깊은 민족이라고는 말하지 않는 것 같다.

리투아니아나 폴란드에는 교회들이 전반적으로 도시나 마을 한 가운데 있는 반면, 라트비아는 (리가를 빼고) 도시나 마을 외곽지역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는 라트비아에서 교회란 그 '독일 지주 나으리님'들의 종교였으므로 농노들이 사는 마을에 그런 교회를 지을 필요가 없었던 때문이라고 한다. 과거의 도시형태는 많이 변화하고 새로이 많이 지어지고 있는 상태에 있으므로 그런 현상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민속연구상 기록에 보면 그런 현상을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라트비아인들 사이에서 '라트비아 사람들도 고등교육을 받으면 독일인이 된다'는 말이 떠돌았던 만큼 교육의 기회도 독일인들에게만 한정되어 있었다. 20세기까지 라트비아에는 고등교육기관이 없어 농민들이 공부를 위해 러시아나 폴란드, 독일 등으로 가는 것을 지원할 만한 상황이 안되었던 것도 이유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근대 이후 '라트비아인'이라는 말은 무조건 교육을 받지 못한 '농노와 소작인'을 일컫는 것이었다고 한다.

라트비아인들 사이에서도 그 교육받은 '독일인'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라트비아는 아니지만, 독일인들이 점령했던 프러시아 영토내(현재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지역)의 리투아니아인들의 경우, 일부러 리투아니아인이 아닌 독일인들처럼 보이기 위해 독일어로만 구사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부모들조차 그것을 독일인들의 밑에서 성공하기 위한 발판으로 이해하여 묵인하곤 했다고 한다.

19세기 중 에스토니아 타르투 대학교에서 유학하던 라트비아 학생 '크리샤니스 발데마르스(Krisjanis Valdemars)'는 그런 선입견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자기 방문 앞에 '나는 라트비아인이다'라는 '노골적인(?)' 구절을 붙여놓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 발데마르스는 라트비아 최초의 신문을 발간하는 등 라트비아 민족개혁운동의 선각자로 성장하였다.

서진석의 <발트3국 이야기> 고등교육 받으면 독일인이 된다?



2.3. 20세기[편집]


1940년대에 라트비아는 나치 독일의 점령을 받았고 독소전쟁 후반에 소련군의 재점령을 받았다.# 라트비아가 소련 해체 이후에 독립국이 되고 양국은 수교했다.


2.4. 21세기[편집]


양국은 유럽연합, 나토, 발트해 국가 이사회 회원국들이다.# 그리고 2004년 이후에 라트비아가 유럽연합, 나토에 가입하면서 양국간의 교류, 협력이 많아지고 있다. 라트비아는 독일과 협약을 맺고 독일식 직업교육 과정을 들여왔다.#

2020년 2월 28일에 뮌헨에서 라트비아로 돌아온 여성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2022년 2월 15일에 양국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가졌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자 양국은 협력해 대러 제재에 나섰다. 독일측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보내지 않자 라트비아측이 비판했다.#1#2


3. 경제 교류[편집]


2014년 1월 1일부터 라트비아가 유로화를 도입해 양국은 공식적으로 유로 사용국이 됐다.# 그리고 블룸버그통신은 일마르스 림세빅스 라트비아 중앙은행 총재에 대해 꾸준히 주장해온 긴축정책과 구조개혁의 궤적이 긴축을 주장해온 옌스 바이트만 분데스방크 총재의 의견과 일치한다고 전했다.#


4. 문화 교류[편집]


라트비아의 유럽연합 가입 이후, 독일어는 주요 외국어로 지정됐다. 그리고 독일로 이주하는 라트비아인들이 많은 편이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라트비아에서 개발됐지만, 독일로 전파돼 전세계로 퍼졌다.#

KCI 등재 논문 : 쿠를란드 공국의 라트비아 문화사적 가치 연구


4.1. 스포츠[편집]


2020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이 라트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겼다.#1#2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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